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을 출산한다. 이에 대신들은 암
암리에 영창대군의 지지파와 광해군의 지지파로 분리 된다. 하지만 선조의 병이 악
화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리지만, 영의정 유영경
은 이를 감춰버린다. 나중에 발각되지만, 그 때는 이미 선조가 운명을 달리 한
명분으로 무력반정을 일으킨다. 이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숭명배금의 외교정책을 펼친다. 한편 반정공신 중 한명인 이괄은 반정 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데(이괄의 난), 반란이 실패 한 후 청으로 도주해서 광해군이 억울하게 폐위되었다고 주장하여 청은 정묘호란의 명분을 가지
명나라와 전면전을 치르기 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을 굴복시키거나 자신에 우호적인 정권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여진족인 후금과 전쟁 또는 화친이라는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한 시기였다.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2. 광해군의 중립외교
계속하여 세력을 확장하던
명의 요청을 따르되 전세의 상황을 보아 강홍립에게 향배를 지시한 것이었다. 그 후 광해군이 인조반정(1623)으로 쫓겨나고 인조가 왕에 즉위하였다. 인조는 친명배금의 정책을 썼으므로 후금과의 관계는 자연히 나빠졌고 이것은 후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조선의 서북방에서는 명나라 장군 모
압력을 받고 있었다.
선조는 임란 중에 수 십여 차례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수를 치기도 하여 광해군을 곤경 으로 몰아넣곤 하였다. 임란 이후 왕권을 강화해 가는 선조에게 광해군은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광해군이 세자로 있는 한 그에 대비하여 선조의 흠이 커 보이기 때문이었다.
보충한 부분이 많아 실록의 편찬 과정 및 작성자의 편찬태도 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룬다.『광해군일기』만을 본다면,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판단한다면 광해군은 분명 폭군이라고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라의 현대 외교역사에서 소위 외교를 잘한다고 칭찬받는 인물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 시대는 어떠한가. 조선시대의 실리적 외교정책이라고 하면 흔히 광해군을 떠올린다. 광해군은 과거 폭군으로 치부되었으나 최근 들어 서서히 광해군의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명을 하기에 앞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연산군, 광해군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으며,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야사 속 연산군과 계축일기 속 광해군의 모습을 살펴보려한다.
(1) 야사 속 연산군
- 성종이 궐 안에서 몸소 기르던 사슴이 연산군의 옷과 손등을 핥았다. 연산군은 사슴을 걷
. 정묘호란은 정묘년(丁卯年)에 발생한 오랑캐의 난으로 정묘호란이라는 이름이 붙였다. 후금은 본래 조선과 친교(親交)하고 명(明)을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이 강력한 배금(拜金) 정책을 펼쳤던 관계로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침공하여 명나라 정복의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 정책이 맞물린 결과
ㆍ정묘(丁卯) 년에 발생한 오랑캐의 난
→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는 이름이 붙여짐
ㆍ후금은 조선과 친교(親交) 하며 명(明)을 정복하고자 하였음
- 조선의 친명(親明) 정책
-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침공하여 명나라 정복에 있어 걸림돌을